책소개
‘귀족’은 자신의 영지에서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살아간다. 광대와 하녀까지 거느렸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성을 방문한다. 친구의 등장으로 ‘귀족’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는 최근까지 급진적인 성향의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던 사회주의자였다. 하녀와 시종, 어릿광대가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귀족’으로 받들어 모시는 기이한 상황 앞에서 친구는 당황한다.
1904년대에 사회주의자로 활약하던 인물이 왜 조부의 영지로 기어 들어가 ‘1808년(농노제 폐지 이전)의 삶’을 재현하며 살아가게 되었을까. 귀족과 친구의 대화에서 그 이유가 조금씩 드러난다. 현대의 문명이 세계를 진보시켰는가,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로 뿌연 하늘이 과거의 하늘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현대보다 과거에 있지 않은가. ‘귀족’이 시대를 역행한 배경에는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귀족’을 설득해 문명의 세계로 다시 끌고 나오려던 친구는 오히려 ‘귀족’에게 설득당하고 만다.
예브레이노프는 현실 대신 허구를, 삶 대신 예술을 택한 귀족의 아름다운 자태를 정지 화면으로 고정하고자 한 듯하다. 귀족이 만든 허구 세계에 감동해 눈물 흘리는 친구를 아름답고 매혹적인 ‘포즈’로 바라보는 귀족과 그의 연인은 아름다움의 절정에 달한 정지된 형식이자 생명 없는 밀랍 인형처럼 그려진다. 귀족의 친구가 그들에게 ‘곧 닥칠 죽음’을 예언한 것은 어쩌면 예브레이노프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인지도 모른다. 늙고 병든 ‘아름다운 폭군’은 이 비극적인 현실을 연극적 환상으로 봉합하고자 했던 예브레이노프에게는 상상 불가능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독특한 단막극을 ‘드라마의 마지막 장’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렇듯 정지된 아름다움의 절정이 결국은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실존의 화려한 불꽃놀이의 끝점임을 분명히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자평
예브레이노프는 ‘삶이 곧 연극’이라는 태도로 작품 활동에 임하며 ‘삶의 연극론’이라는 독특한 연극적 방법론을 구축해 나간다. <아름다운 폭군>은 일찍이 그의 연극론적 특징들을 두루 선취한 작품입니다.
지은이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예브레이노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Евреинов, 1879∼1953)는 스타니슬랍스키, 메이예르홀트 등 동시대 연출가들에게 가려져 국내에는 많이 소개되지 못한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극작가다. 1879년 모스크바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러시아로 귀화한 프랑스 귀족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5년, 희곡 <행복의 기저>가 전문 극단의 무대에 오른 뒤로 그의 희곡 여러 편이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되었다. 1907년에는 고전극의 재구(再構)를 통한 연극적 시대의 부활이라는 비전을 품고 설립된 ‘고전극장’의 상임연출자가 되었으며, 1908년부터는 코미사르젭스카야와의 불화로 극장을 떠난 메이예르홀트의 뒤를 이어 ‘코미사르젭스카야극장’ 예술감독으로 일하며, 당시 유행하던 카바레-소극장 ‘휘어진 거울’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 작곡가로 활약했다. 1910년대에 이르면 제도로서의 극장에서 멀어져 본격적으로 ‘삶의 연극론’에 몰두한다. 혁명 전야인 1914년부터 1916년까지는 핀란드에서 칩거하며 총 세 권으로 이루어진 대작 ≪자신을 위한 극장≫을 탈고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세워진 후, ‘소비에트 제2극장’ 연출자로 일해 달라는 ‘소비에트 제1극장’의 연출가 메이예르홀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1925년, 파리로 망명했다. 망명 초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프랑스에서 영화화되는 등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지만, 점차 대다수의 망명 작가들처럼 ‘땅을 잃고 잊힌’ 작가의 삶을 살게 된다. 아내의 회상록에 따르면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던 예브레이노프는 화려한 변형도, 불멸로 이어질 죽음도 꿈꾸기 힘든 파리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여전히 정열적으로 러시아 연극사를 집필했고, 즐겨 아를레킨의 옷을 입었으며, 죽기 2주 전쯤부터 곧 닥쳐올 ‘삶의 연극’의 피날레를 예감하고 운명했다.
옮긴이
안지영은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러시아학술원 산하 러시아문학연구소에 <20세기 초 러시아모더니즘 드라마에 나타나는 ‘발라간’의 문제>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경희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는 예브레이노프의 ≪가장 중요한 것≫(문학과 지성사),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와 ≪메이예르홀트의 연출 세계≫(공역, 한국문화사), ≪코레야, 1903 가을≫(공역, 개마고원)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예브레이노프의 연극론 읽기>, <포스트소비에트의 아방가르드 연극에 관한 小考 : 안드레이 모구치와 포르말느이 극장>, <변환기의 햄릿과 체호프 :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햄릿주의’에 관한 小考>, <긴카스와 체홉, 긴카스의 체홉> 등이 있다.
차례
아름다운 폭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는 선조들이 유산으로 물려준 가장 소중한 것, 믿을 만한 지식과 견고한 도덕률을 탕진해 버렸어. (…)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들 중 우리에겐 다른 쓰레기 더미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이 있네. 그건 그들의 의상, 아름답고 화려한 의상이라 부를 수 있는 ‘웅변’과 ‘포즈’일세.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