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산문답
홍대용의 ≪의산문답(毉山問答)≫
눈을 떠, 조선
사람은 낮에 일하고 밤에 잠든 뒤 아침을 맞는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조선은 오백 년을 잠들지 않았고 그러니 아침도 맞지 못한다. 졸고 있을 따름이다. 그때 홍대용과 그의 친구들이 외친다. 눈을 떠, 조선. 해가 중천이야.
허자가 말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했는데, 지금 선생님께서 땅의 형체가 원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실옹이 말했다.
“사람을 깨닫도록 하기가 심히 어렵구나. 만물이 생김은 모두 둥글고 네모진 것은 없는데, 하물며 땅에 있어서랴.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일어나는데, 해의 가려진 모양이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형체가 둥글기 때문이다.… ‘무릇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것을 어떤 이는 천지의 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시 그대는 옛날 사람이 기록한 말을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제 현상을 따르는 편이 더 낫다.”
≪의산문답≫, 홍대용 지음, 김태준·김효민 옮김, 40~42쪽
누구의 문답인가?
허자(虛子)와 실옹(實翁)의 문답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중국 동북지방의 3대 명산으로 이 책의 배경이다.
허자와 실옹의 캐릭터는 어떻게 설정되나?
허자는 조선의 선비로, 30년간 주자학과 성리학만을 공부한 사람, 실옹은 새로운 학문을 터득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허자는 30년 공부로 깨달은 바를 유세(遊說)하여 조선에서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중국 연경에서 선비들과의 담론으로 두 달을 보낸다. 결국 실망하고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경계인 의무려산에서 실옹과 만난다. 여기서 그의 30년 학문은 허학(虛學)으로 낱낱이 해체된다.
이름에 허(虛), 실(實)을 사용한 것은 실학파의 프로파간다인가?
인물의 이름을 대립적으로 지은 설정에서 작품의 문학적, 실학적 상징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허자는 허학에 골몰하는 세속 유학자를 대표한다. 세속 학문이 허학으로 해체당하는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거짓됨에 있다. 이러한 ‘허학’ 진단은 이를 지양하여 충실화하는 ‘실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허와 실의 담론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서로를 소개하는 인사에서 시작해, 문답 대결을 통해 우주론과 역사론에 이르는 철학적 내용이 중심이다. 그래서 이 글을 철학 소설이라고 하는 내 주장과는 달리, 철리산문(哲理散文)이라고 보는 주장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단지 철학적인 글만은 아니고, 인물 설정만 봐도 문학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글임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 정도 구성으로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지 않은가?
하지만 허구적 인물들을 내세우고 의산이라는 배경을 설정한다. 인물균(人物均) 사상과 천문지리론, 인물 역사론이 서로 유기적으로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정도면 철학 소설의 면모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수준으로 평가하는가?
철학 수준만으로 보더라도 이 작품은 조선 18세기가 이룩한 동아시아 최고의 지적 성취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8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지적 성취라는 평가의 근거는 어디 있는가?
홍대용 철학의 중심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인물균 사상과 함께, 무한우주론(無限宇宙論)과 생명사상,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까지를 통합 논의한다. 당대 사상과 문학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인물균 사상이란 무엇인가?
사람 사이의 평등 사상은 물론 금수 및 초목이 모두 동등하다는 사상이다. “사람, 금수, 초목 세 가지 종류의 생물에 귀천이 있느냐”는 실옹의 물음에, 허자는 금수와 초목은 “슬기와 깨달음, 예의가 없기 때문에 사람보다 천하다”고 답한다. 이에 실옹은 사람의 예의와 금수, 초목의 예의가 다를 뿐 하늘에서 바라보면 사람과 물은 평등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동식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자만심의 뿌리라고 말한다.
무한우주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실옹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주는 텅 비어 기(氣)로 가득 차 있으며, 지구, 달, 해, 별은 그 기운이 모여서 만들어진 형체다. 지구에서 보기에 가까워 보이는 저 하늘의 별들은 실제로 몇 천, 몇 만, 몇 억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별들의 수는 무궁무진하며 하늘의 둘레는 한량없이 멀다.” 홍대용은 스스로 혼천의(渾天儀) 세 대를 만들어 사설 천문관측소 농수각(籠水閣)을 세워 천체를 관측했으며, ≪주해수용(鑄解需用)≫이란 수학 책에서 천체관측 등을 계산한 수학자였다. 하늘만 회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즉 지구가 회전한다는 주장을 그는 계산으로 밝혔다.
역외춘추론이란 탈중화사상인가?
중국 밖에도 역사가 있다는 자주사관(自主史觀)이다.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자연물이 다 마찬가지라는 인물균 사상에서 보면, 우주에는 무한한 별들의 세계가 있고, 별들은 무한히 운동하며, 결국 위와 아래도 없고 안과 밖도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것이 홍대용의 무한우주론이며 이는 ‘중심’에 대한 개념, 구체적으로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화이론(華夷論)을 반박했다. ≪춘추(春秋)≫가 중국의 역사라면 각 민족도 자신들의 역사가 있다는 역외춘추론은 결국 실학적 자주사관이다.
홍대용은 어떤 인물인가?
실심실학(實心實學)을 목표로 한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혼천의를 만든 과학자이며 양금(洋琴)을 만들고 거문고의 명인인 음악가이기도 했다. 이 책의 지은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허자와 실옹을 모두 지향한 인물이었다.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을 공부해 실학에 정진했으며 고학과 상수학은 물론 수학과 음악에도 밝은 백과전서적 통합과학자였다.
연암의 한문소설 ≪호질(虎叱)≫과 동기와 기법이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흥미로운 의문이다. 나는 이런 흥미를 바탕으로 두 작품을 ‘3장으로 된 대결의 장면 구성’, ‘꾸짖는 자와 꾸지람을 당하는 자의 인물 구성’, ‘인물들의 대결 양상’, ‘실학론과 인물성동론적 내용’ 등으로 나누어 비교했다. 이 두 글을 함께 읽으면 두 작품은 물론,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터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태준이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다.